7세기 말부터 10세기 초까지 존재했던 고대 국가인 발해는 고구려의 문화와 생활을 계승하면서도 당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한 독자적인 문명권이었다. 발해의 고분 벽화는 이들의 예술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당의 문화를 수용하는 동시에 고유한 색채를 드러내는 특징을 갖고 있다.
당의 미술 양식과 문화를 반영한 발해 벽화의 수용 양상
발해 고분 벽화에는 당나라의 예술 양식과 사상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는 발해가 국제 질서 속에서 문화적 위상을 확립하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이자, 실질적인 정치 외교 관계에 따른 영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벽화의 인물 표현, 채색 방식, 구도 구성 등에서 당의 미술과 유사한 점이 다수 나타나며, 이는 발해 미술이 당 문화를 모방하거나 이를 이상적인 문화로 인식했음을 시사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용정시 일대에서 발굴된 발해 벽화 고분들이 있다. 이들 고분에서는 무덤 벽면에 그려진 인물상과 건축 표현, 각종 장식이 당대 당나라 무덤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인물의 옷차림은 중국식 관복이나 여성의 당풍 복식이 재현되어 있으며, 머리 모양, 화장법, 악기, 가구 등에서도 동일한 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발해 상류층이 당 문화를 고급 문화로 받아들였으며, 사후 세계에서도 그 문화적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건축적 표현에서도 당의 영향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벽화 속에는 정면성이 강조된 궁궐이나 누각 형태가 자주 등장하며, 대칭적인 배치와 기하학적 형태는 당대 불교 회화나 왕실 건축 도안과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이는 발해의 귀족들이 당의 궁궐 문화를 이상적인 사회 질서로 상상했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한다.
벽화의 채색 기법과 안료 사용에서도 당나라 화풍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발해의 벽화에서는 선명한 적색, 녹색, 청색을 주요 색상으로 사용하였으며, 이는 당대 궁중 회화에서 자주 사용된 색조와 유사하다. 또한 선의 사용법이나 명암 표현 방식도 입체적이고 정교하여,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발해 화가들이 당 미술의 특징을 학습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당 문화의 수용은 단순한 복제나 종속의 결과가 아니었다. 발해는 당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조공을 보내는 동시에 자주적인 국가로서 자신의 문화 정체성을 구축해 나갔다. 벽화 속 당풍 양식은 외형적 차용일 수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주제의식과 장면 구성은 발해 고유의 사고방식과 미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영향 수용이 아닌, 선택적이고 전략적인 문화 활용의 결과였다.
발해 고유의 독자성과 자주성: 고분 벽화 속 고유 문화 요소들
발해의 고분 벽화는 외래 문화를 수용한 흔적과 동시에 발해인 고유의 문화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는 그들이 단지 당나라의 문화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이를 자신들의 역사적 경험과 미의식에 맞게 재해석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창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벽화 속 여러 장면은 발해 사회의 일상생활, 종교적 의식, 신화적 세계관 등을 반영하며, 이는 고유의 문화적 기반 없이는 구현될 수 없는 내용들이다.
특히 발해 고분 벽화에서 나타나는 동물상과 자연 표현은 그 독자성을 대표하는 요소다. 발해 벽화에는 종종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신화적 동물이나 상상 속 존재가 등장하며, 이는 고구려 미술에서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자 발해 특유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예를 들어 용이나 봉황, 해태와 같은 상징적 동물들은 왕권의 신성함과 국가 질서의 수호자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표현은 당 회화에서는 흔하지 않은 요소로, 발해가 자신의 신화 체계를 시각화하는 데 적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벽화의 주제 구성에 있어서도 발해는 뚜렷한 독창성을 보인다. 단순히 귀족의 권위를 과시하거나 이상적인 사회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무덤의 주인이 생전에 수행한 직무, 가족의 구성, 장례 의식 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경우도 있다. 이는 발해의 장례 문화가 매우 정교하고 상징적으로 조직되어 있었으며,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철학적 관점을 중시했음을 시사한다.
특이하게도 발해 벽화에는 북방계 유목문화의 흔적도 확인된다. 마상무사, 사냥 장면, 말과 수레의 묘사 등은 발해가 계승한 고구려 및 말갈 문화의 일면을 반영한다. 이는 당과의 교류 속에서도 자신들만의 뿌리를 잊지 않고 있었으며, 문화를 통해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이러한 북방계 요소들은 단순한 회화 기법을 넘어서, 발해 문화의 지리적 복합성과 민족적 다양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벽화의 인물 묘사에서도 독자성이 발견된다. 당풍 복식을 차용하면서도, 발해 고유의 관모나 의복 구조가 함께 표현되기도 하며, 이는 일종의 문화 혼합 양식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복합성과 융합성은 발해 문화가 단일한 정체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층적이고 유동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것은 오늘날 발해를 연구하는 학계가 그 정체성을 논할 때 ‘융합 문화’ 또는 ‘복합 문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즉, 발해 벽화는 단순히 당나라의 문화적 아류가 아닌, 독자적인 문화체계 속에서 선택적 수용과 적극적 창조를 통해 만들어진 예술 결과물이다. 이처럼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당 문화와 유목 문화를 융합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문명을 구축했던 주체적인 국가였다.
발해 벽화를 통해 본 국제질서 속의 문화 정체성
발해의 벽화는 국제 관계와 문화 외교 속에서 형성된 문화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발해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당시 동북아 국제질서 속에서 활발히 움직였던 국가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했다.
당과의 교류는 발해 문화 발전에 큰 자극이 되었지만, 이는 문화적 종속이 아닌 자율적인 선택과 활용의 결과였다. 발해는 당의 관료제와 문물 제도를 일부 받아들였지만, 정치적으로는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자주성을 지키려 했다. 벽화 속 표현된 문화 요소들도 이러한 양면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당풍 양식과 고구려 전통, 말갈 유산이 함께 존재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문화적 융합은 발해가 당시 다민족 국가였다는 사실과도 연관이 있다. 발해는 고구려계 주민뿐 아니라 말갈계, 한계, 거란계 주민까지 포함한 다원적 국가였으며, 이는 문화에서도 나타난다. 고분 벽화는 이러한 다양한 집단이 공존하면서 만들어낸 문화적 타협과 조화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예컨대 귀족 무덤에서는 당풍의 고급 문화가, 지방의 고분에서는 보다 실용적이고 지역적 특성이 강한 요소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오늘날 발해를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발해의 문화 정체성은 단일 민족이나 단일 문화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주변 세계와의 활발한 교류 속에서 형성된 개방적이고 복합적인 구조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벽화는 그 상징이자 증거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발해라는 국가의 외교 전략, 문화 철학, 정치적 입장을 동시에 읽어낼 수 있다.
발해 고분 벽화는 당 문화의 영향을 수용하면서도 발해 고유의 문화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복합 문화 속에서 선택적으로 외래 문화를 수용하고 창조한 결과이며, 발해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말해주는 귀중한 시각 자료다. 발해 벽화를 통해 우리는 고대 동북아 국제관계 속에서 문화가 어떻게 생성되고 융합되었는지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