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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고분, 돌무지무덤과 굴식 돌방무덤 비교

by qivluy 2025. 7. 30.

삼국시대는 고대 국가의 틀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던 시기로, 다양한 문화와 기술이 발전하며 고분의 양식도 급속히 변화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고분 양식으로는 돌무지무덤과 굴식 돌방무덤이 있으며, 이 두 고분 형태는 각기 다른 지역적, 정치적 배경 속에서 등장하고 발전했다.

삼국시대 고분, 돌무지무덤과 굴식 돌방무덤 비교
삼국시대 고분, 돌무지무덤과 굴식 돌방무덤 비교

신라의 왕권 상징인 돌무지무덤의 구조와 의미

돌무지무덤은 삼국시대 초기 신라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무덤 양식으로, 대형의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형태가 특징이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일대에서 특히 많이 발견되며, 대표적인 예로는 천마총, 황남대총, 금관총 등이 있다. 이들 고분은 단순히 거대한 구조물이라는 점을 넘어, 당시 신라의 권력 구조와 장례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고고학적 유산이다.

돌무지무덤의 기본 구조는 나무로 만든 목곽을 중심으로 두고, 그 위에 자갈과 돌을 겹겹이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내부에는 유물을 함께 매장한 공간이 존재하며, 목곽 안에는 피장자의 유골과 함께 다양한 부장품이 놓여 있었다. 이처럼 목곽을 중심으로 돌과 흙을 덮는 방식은 방부 처리의 기술이 부족했던 당시로서는 시신 보존을 위한 실용적 대안이기도 하였다.

무덤의 외형은 보통 원형 또는 타원형에 가까운 봉토 형태를 띠며, 직경은 수십 미터에 이르고, 높이도 수 미터에 달한다. 이러한 거대한 규모는 무덤의 주인이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왕이나 귀족층이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돌무지무덤에서 출토된 금관, 금제 장신구, 유리구슬, 말장식 등은 당시 피장자의 높은 신분과 국제적 교류의 흔적을 동시에 보여준다. 예를 들어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는 신라가 단순한 농경 사회를 넘어, 예술과 신앙이 융합된 문화 국가였음을 시사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이러한 돌무지무덤의 또 다른 특징은 그 폐쇄성이다. 구조상 재사용이 불가능하며, 한 번 봉인되면 다시 열 수 없는 방식이다. 이는 무덤의 신성성과 불가침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해석되며, 당시 신라 사회가 왕의 권위를 사후에도 유지하려 했던 장례 철학을 잘 보여준다. 또한 건축에 투입되는 노동력과 자원으로 미루어 보아, 이러한 고분은 중앙 권력이 강하게 작동했던 시기의 산물로 평가된다.  결론적으로 돌무지무덤은 신라 초창기 왕권의 상징으로, 그 구조와 출토품은 고대 신라 사회의 정치, 종교, 예술, 기술 수준을 모두 반영하는 복합적인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굴식 돌방무덤의 발전으로 보는 백제, 고구려 고분 문화

굴식 돌방무덤은 돌을 다듬어 방처럼 만든 무덤방을 지하에 설치하고, 통로를 통해 무덤방에 접근할 수 있게 설계된 고분 양식이다. 이 방식은 주로 고구려와 백제 지역에서 발전하였으며, 삼국시대 중·후기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굴식 돌방무덤은 무덤 내부를 벽화로 장식하는 문화와 결합되면서 고대 동아시아 미술의 중요한 보고로도 평가받는다.

고구려의 굴식 돌방무덤은 벽화 고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대표적인 예로는 안악 3호분, 덕흥리 고분, 강서대묘 등이 있다. 이들 무덤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로 방을 만들고, 벽면에 사신도나 일상생활 장면을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벽화는 고구려인의 사후관, 종교관, 계급의식뿐만 아니라 복식과 주거문화, 무기체계까지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백제의 굴식 돌방무덤도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으며, 특히 공주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이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이 중 무령왕릉은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그 구조와 부장품의 보존 상태가 매우 뛰어나 고고학적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 무령왕릉은 벽돌로 정교하게 방을 만들고, 그 안에 왕과 왕비의 관을 나란히 안치한 형태를 띤다. 출토된 유물에는 금제 관장식, 청동 거울, 목제 베개 등이 있으며, 이는 백제의 예술성과 국제 교류 관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굴식 돌방무덤은 구조적으로 통로를 통해 무덤 내부에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돌무지무덤과는 다른 개방성과 실용성을 지닌다. 이로 인해 가족 묘나 재사용 가능한 묘제로도 사용되었으며, 특히 귀족층의 묘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히 매장 기능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망자를 돌보려는 후손의 의식과도 연관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굴식 돌방무덤은 당시 기술의 정밀도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무덤을 구성하는 돌의 가공, 벽화 제작 기술, 내부 배치의 규칙성 등은 고대 삼국의 건축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방증한다. 이는 단순한 장례 문화를 넘어서, 사회 전반의 예술과 과학 수준을 반영하는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다. 굴식 돌방무덤은 삼국시대 중후기 고대국가의 예술성과 기술, 사회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고분 유형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고분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두 고분의 비교를 통해 본 삼국의 장례문화와 정치구조

돌무지무덤과 굴식 돌방무덤은 각기 다른 지역과 시기, 그리고 정치적 배경 속에서 발전한 고분 양식이지만, 두 고분 모두 당시 삼국의 장례 문화와 권력 구조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가 된다. 특히 두 무덤의 차이는 단순한 구조상의 차이를 넘어서, 장례에 담긴 철학과 정치 이념, 예술적 표현 방식의 차이를 반영한다.

돌무지무덤은 주로 신라에서 사용되었으며, 폐쇄성과 단일성, 거대한 규모가 특징이다. 이는 중앙집권적 권력이 강하게 작용하던 신라의 정치적 상황과 맞닿아 있다. 왕권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에서, 한 번 매장된 무덤은 다시 열지 않는다는 불가침의 원칙은 죽은 자를 신성시하며 왕의 권위를 강화하는 문화로 볼 수 있다. 또한 무덤에 담긴 금관과 화려한 부장품들은 죽은 자의 신분과 생전의 권력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며, 후손들에게 그 권위를 계승하는 도구로 기능하였다.

반면 굴식 돌방무덤은 고구려와 백제에서 발전하며,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예술성이 강조된 형태를 띤다. 무덤 내부에 벽화를 그려넣고, 관을 배치하는 방식은 죽은 자와 산 자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의식을 드러낸다. 이러한 점에서 굴식 돌방무덤은 후대 제례의 편의성과 조상 숭배 문화, 그리고 유교적 전통과도 일부 연결 지점이 있을 수 있다. 특히 고구려 벽화는 죽은 자의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세계관을 형상화하는데, 이는 단순한 장례 공간이 아닌 예술과 신앙의 융합체로 평가된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두 고분은 각각의 특성을 보여준다. 돌무지무덤은 대규모 석재와 목재를 이용한 집단 노동의 산물이며, 건축적 안정성과 보존력을 높이는 구조적 노력이 엿보인다. 반면 굴식 돌방무덤은 정밀한 석재 가공과 채색 기술, 미술 감각이 결합되어, 단순한 건축을 넘어 조형예술의 수준까지 도달한 형태로 평가된다. 이처럼 삼국의 고분 문화는 단순한 무덤의 양식을 넘어 당시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작용한다. 고분의 구조를 통해 우리는 권력의 흐름, 사회 계층, 예술과 신앙의 모습까지 다각도로 접근할 수 있으며, 고대 국가 형성의 실체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고분 양식은 지역별 문화와 권력 구조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하였으며, 돌무지무덤과 굴식 돌방무덤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들 고분은 단순한 장례 시설을 넘어서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 정치 체계, 예술적 수준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구조의 차이는 곧 문화의 차이를 반영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고대 삼국의 문명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